-권규미
날 선 볏잎들이 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부드러운 제 생각의 깊이를 이루는 동안 어린 나는 산그늘에 누운 바위 할멈에게 책을 읽어 주곤 했네
천연스런 그는 주름진 눈을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외로운 내 독서를 마른 호수에 드는 물길같이 잘도 받아 마시었는데 그 천연스러움이 부러워 킁킁 더운 김을 부리며 엉덩이를 문지르는 늙은 암소를 바위도 나도 서로 웃고만 있을 때 산그늘 크단 입 속에 골짜기 통째 잠겨 버리고 심술로 뒤뚱거리는 소를 따라 우쭐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들이 있었네
그 간절하고 나지막한 시간의 잎새들이 어스름 깃드는 저녁마다 별처럼 돋아나네 가뭄과 홍수와 햇빛과 바람 속에 그 무심하던 할멈 여전하신지 산그늘 당겼다 놓고 당겼다 놓으며 슬하에 곤줄박이 몇이라도 거두었는지 이슬의 행간을 빌려 편지를 쓰고 싶네 요새는 늙은 책이 나를 읽는 중이라고 쓸쓸한 소식 전하고 싶네
권규미/ 경북 경주 출생
경주문학상 수상(2012)
시집 『저녁푸른각시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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