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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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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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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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인 만 (작가) 
 
 서울대 종합캠퍼스는 1960년대 말부터 건설이 진행돼 관악산 기슭에서 1971년 4월 2일에 기공식을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시내에 흩어져 있던 국립서울대학 캠퍼스를 한곳에 통합해 건설하는 내용의 친서를 서울대 총장에게 전하고, 건설현장에 나가 공사 진척상황을 살폈다. “서울대에는 여학생도 적지 않은데 관악산 뱀이 구내에 못들어 오게 할 방책도 마련해 보시오.” 현장 책임자에게 이런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관악캠퍼스 건설에 대하여 서울대를 변두리로 쫓아낸다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데모하는 학생들이 귀찮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한 곳에 모아두면 데모를 막기도 편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관악캠퍼스 기공식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4일 홍릉 서울연구개발단지 기공식이 있었다. 서울연구개발단지는 1969년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들어서고, 한국과학원, 국방과학연구소, 한국개발연구원이 들어오게 되는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이다. 기공식에 참석하러 가는 대통령과 경제기획원장관(김학렬), 과학기술처장관(김기형) 등의 차량이 신설동을 지나 안암동으로 접어들었을 때다. 차량이 홍릉 쪽으로 가는 도중 갈림길에서 직진해야 되는데 급히 우회전했다. “왜 돌아가려는 거야?” 1호차에서 박정희가 물었다. “학원 소요로 도로 사정이 안 좋습니다.” 학생들의 투석이 격렬해 경찰이 대치 중이라고 비서관이 보고했다. 그날 서울대 사대에서는 교련 반대 데모가 벌어졌다. 당시 대학가는 봄 개강과 더불어 교련 철폐 요구가 빗발쳤고, 대통령 박정희의 3선을 앞둔 4월 27일의 제7대 대통령 선거 일정에 민감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관없어. 바로 가.” 승용차 행렬이 청량리 서울대 사대 앞에 이르자 돌과 연탄재가 무수히 날아왔다. 1호차는 사이렌을 울리며 속력을 내는 경찰 백차를 뒤따라 시위 현장을 신속히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탕!’ 충격음을 내며 1호차에 떨어졌다. 박정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 세워!” 그가 차에서 내리자, 수행원들은 아연 긴장했다.
 돌을 던지던 학생들은 세단차에서 검은 얼굴 키 작은 사람이 내려 학교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것을 보고 처음엔 누군지 알지 못했다. 경호원들이 재빨리 거총자세로 에워싸고 경찰이 겹겹으로 진을 치자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대통령이다!” 누군가 소리질렀다. “대통령이다!” “박정희다!” 그 소리에 학생들이 정신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학생들은 교정 안으로 숨어버렸다. 박정희는 대학구내 학생처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학생 지도를 똑바로 하시오. 이럴 때일수록 총장 교수들이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하지 않겠소?” 학교 관계자들을 질책하고 경찰에게 명령했다. “손에 흙 묻은 놈들 다 잡아넣어!” 그런 다음 다시 차에 올랐다.  그날 대통령 지시에 따라 정사복 경찰 1백여명이 서울사대 교정 안팎을 샅샅이 뒤져 학생 70여명을 연행했다. 박정희는 학생들을 그날 밤 안으로 전원 석방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1975년 10월 이후 세 차례 청와대에서 단독회견을 했던 일본의 문화평론가 후쿠다 쓰네아리는 대통령이 서울대 사대에 들어갔던 일을 질문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학생들이 설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소. 총장과 교수들이 학원 소요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대통령이 데모하는 학생들을 향해 교정까지 들어간 배경에는 당시의 긴박한 안보 상황이 있었다. 1971년 그해 3월 미국은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시켰고, 북한은 “수령동지의 환갑을 서울에서!”라며 날뛰었다. 후쿠다 쓰네아리는 “박 대통령의 미소 속에 그분의 고독을 읽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고 권력은 최고 책임을 동반한다. 대통령은 마땅히 중요한 국가 현안에 대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 대통령 박정희의 국가경영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책임지는 권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1968년 주민등록증 발급으로 국민 개개인이 고유의 주민등록번호를 갖게 되었을 때 박정희는 당연하다는 듯 번호 조합체계로 첫번째에 해당하는 번호를 가졌다. 대한민국 `주민등록번호 1번’의 주인공은 박정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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