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만민평등’ 외치는 수운을 스승으로 모셔
가르침 배우기 위해 한달 두세차례 80만리 떠나
해월은 겨울 엄동설한에 집앞 계곡물에 들어가
“찬물은 몸에 해롭다’ 하늘 말 듣고 진리 깨달아
수운 최제우 체포 소식에 만나기 위해 안간힘
‘멀리 도망가라’는 뜻 받아 만남 뒤로 하고 떠나
해월, 1862년 3월부터 영덕·상주·예천 등 포덕
1863년 북도중주인 임명, 8월엔 도통 물려 받아
은거 유허비는 높이 250㎝, 너비 430㎝로 중간비석은 오석이며 나머지는 자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서체는 음식디밀방을 저술한 장계향 선생의 글씨체로, 그 역사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제막식이 열린 일월면 용화리 지역은 해월 최시형 선생이 1865년 3월부터 1871년 3월까지 7년간 거주하며 동학을 재건한 중요한 장소로, 이곳에서 동학의거를 일으켰다. 이 지역은 후에 동학혁명과 3·1운동, 어린이날 등의 기초가 된 동학 대도소 본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 간의 차별을 철폐하자는 인간 존중의 가치를 강조하며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파했다.
동학혁명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 등을 구송하고 필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던 장소이다. 이곳은 탄압받던 동학의 불씨를 되살리고 교단을 재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천도교 윤석산 교령은 유허비 비문 해설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한 동학의 정신과 혁명의 싹을 피워낸 영양의 가치를 잘 담아내고 있다”고 전하며, 참석자들에게 영양에 대한 자부심과 감동을 주었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동학의 2대 교조인 해월 최시형 선생을 다시 영양에 모시는 뜻깊은 날”이라며, “오늘 행사가 지역 자긍심을 높이고, 하늘인 사람이 하늘답게 서로를 모시고 살리는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동학의 빛, 어지러운 시대의 희망
조선은 반상, 남녀, 적서의 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이어 조선말에는 서세동점으로 국운마저 기운다. 관료의 부패와 삼정문란은 민중의 삶은 더욱 곤궁해진다.
이 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만민평등을 내세우며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겠다는 인물이 출현한다.
그가 ‘수운 최제우’이다.
그는 외세에 밀려 백척간두에 선 나라와 백성의 비참함을 목도했다. 그리고 물밀 듯 밀려오는 서구문화를 총칭하던 서학에 맞선다는 의미로 자신의 사상을 동학이라 이름 짓는다. 동학은 반상과 남녀 적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파고든다.
그러나 도를 편지 3년도 채 안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조정과 관의 지목을 받다 마침내 체포돼 참형을 당한다.
△해월 최시형, 동학의 계승자와 그의 여정
동학의 불길은 더욱 타 오른다. 가슴에 품고 실천한 수제자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가 ‘포항 사람’ ‘해월 최시형’이다.
초명은 경상이고 자는 경오였다.
해월은 동학 도호지만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889년부터 접주 또는 육임직 첩지 등에 인장 ‘해월장’을 사용한다. 해월은 이때부터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외가 경북 경주시 황오동에서 태어난다. 다섯 살에 모친을, 열두 살에 부친을 여읜다. 오갈 데가 없자 아버지의 고향 포항 땅으로 거처를 옮긴다.
현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기일리에 정착한 것이다.
여기서 생계를 위해 머슴살이, 한지공장 직공 등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낸다.
열아홉에 밀양 손씨와 결혼한다. 스물여덟 살 때 가족 모두 마북동으로 이사한다. 여기서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을 맡기도 한다.
그리고 서른 셋 나던 해 동네서 멀리 떨어진 검등골(검곡)로 거처를 옮긴다.
자신 소유 논이 없어 화전을 일구기 위해서였다.
△스승을 향한 길, 평등의 꿈을 품고 나아간 발걸음
서른여섯 나던 해 경주 용담에서 이인이 ‘도’를 가르친다는 소문을 듣는다. 해월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용담으로 길을 떠난다.
가르치는 이는 수운 최 제 우 라는 선비였다. 가르침은 동학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 건설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신분이나 계급을 초월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수운을 만나 첫 눈에 큰 감화를 받은 그는 평생의 스승으로 모실 것을 다짐한다. 그리고 한 달에 두 세 차례 80리 먼 길을 마다않고 다닌다.
해월은 스승의 가르침을 충직하게 실천한다. 일 틈틈이 주문을 외우고 수심정기 수련에 몰두한다. 삶의 고뇌와 싸우며 진리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몸을 던진 것이다.
그러던 엄동설한 어느 날 집 앞 계곡물에 몸을 던진다.
그러자 귓가에 ‘찬물에 들어가면 몸에 해롭다’란 하늘의 말이 들렸다. 신비스런 현상에 놀란 그는 곧장 스승을 찾아간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질문에 수운은 “수련이 높은 단계에 올라 그렇다 내가 남원 은적암에서 그런 글귀를 쓰고는 밖에 나가 외쳐 본 적이 있는데 자네가 바로 그 소리를 들은 것이다”고 대답했다.
마음을 맑게 하고 수심정기를 지키면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은 모두 서로 통한다는 진리였다. 해월은 이후 더욱 수련에 몰두하게 된다.
△스승의 가르침을 잇고 동학의 길을 여는 비범한 제자의 성장
스승의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한 일념의 순일한 정성으로 용담을 찾아드는 비범한 제자를 수운 또한 특별한 정성을 기울여 가르치고 이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후 많은 이적과 이야기가 쌓여간다. 해월은 이듬해 1862년 3월부터 영덕, 상주, 흥해, 예천 등지를 다니며 포덕에 힘써 많은 도인이 입도한다. 이 무렵 경상도 도인은 3,000여명을 헤아렸다.
해월은 1863년 북도중주인으로 임명, 8월에는 도통(道統:정통 계승자)을 물려받는다. 이 무렵 조정은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수운의 체포에 혈안이 된다. 그해 11월 20일 수운은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된다. 서울로 압송 도중 철종이 죽자 이듬해 1월 대구 경상감영으로 다시 이송된다.
△스승의 체포와 죽음을 넘어서 포덕의 길을 이어가다
해월은 스승의 체포 소식에 만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직접 만남은 여의치 않았다. 할 수 없이 현풍사람 옥리 곽 덕 원을 통해 연락을 취한다. 밥상을 들고 가는 틈에 소식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수운은 옥리를 보자 해월에게 시 한 수를 전해 달라고 부탁한다. 싯귀는 ‘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나 혐극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은 남아 있다 나는 천명을 순히 받을 것이니 너는 멀리 도망가라는 뜻이었다.
해월은 스승의 뜻을 깨닫고는 만나보지도 못한 채 대구읍성을 빠져 나와 안동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이듬해 스승이 1864년 3월10일 경상감영 관덕정에서 순도했다는 소식을 들은 해월은 하늘을 향해 통곡한다.
이 때 스승의 나이 41세였다. 해월은 스승의 죽음 앞에서 포덕을 멈출 수는 없었다. 관헌들의 눈을 피해 태백산 등 각지로 피해 다니면서 교단을 추스르는데 신명을 다하게 된다.
김상조 역사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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