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민일보] 유리 가가린의 기념탑이 있는 바스크론 계곡은 옛날 금을 캐던 광산이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특히 금을 좋아하는 것이 동·서양의 구분이 없는 듯하다. 한때는 금광으로 유명했던 이곳도 세월의 흔적만 남았을 뿐 아무것도 없다. 계곡 초입의 초원에는 양과 말,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고 가가린의 얼굴을 조각한 기념탑과 조형물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계곡 안쪽으로 한참을 오르면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얼어붙어 빙폭을 만들어 계곡 아래로 내리꽂혀 있다. 좀더 오르며 더 큰 빙폭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일행들은 첫 번째 빙폭에서 하산한다.
계곡아래는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위로는 키 큰 침엽수림이 하늘을 찌르며 하얀 눈 산과 대조를 이룬다. 이곳의 고도가 2300m 지점이라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멀리 우뚝 솟은 설산의 높이가 5000m가 넘는다는 설명이다. 바스크론을 떠나 카라콜로 가는 길에 본 산경치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다시 버스로 1시간 반을 달려 오늘의 목적지인 이시쿨 주(州)정부 도시 ‘카라콜(Karakol)’에 도착했다. 조그마하고 한적한 도시로 도로상태가 좋지 않은 곳이지만 트레커들이 알튼아라샨을 오르려면 이곳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알타미라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간판도 보이지 않는 허름한 건물이 우리가 묵을 호텔이다. 짐을 옮기고 식당으로 내려온 일행들의 한결같은 불만이 시건장치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광객이나 트레커가 그리 많지 않은 시즌이기도 하지만 서비스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듯 하다.
저녁식사는 양고기 바베큐 특식이 나온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뿐인 호텔식당에 열심히 음식을 날라다 주는 여성들이 정성을 다해 서빙해 주고 있어 한결 마음이 가볍다. 양고기 바베큐를 썰어 각자 테이블에 놓아주고는 가이드 울란이 양고기 시식법을 설명한다.
양고기 바비큐 중 머리 부분을 따로 담아와 일행 중 가장 연장자나 대표가 먼저 머리 부분을 먹어야 된다고 필자에게 들이댄다. 살아 있는 듯 눈을 뜬 채 다가온 양의 머리를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그래도 흉내라도 내야 한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양의 엉덩이 살을 동그랗게 베어 내서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고 설명한다. 그것이 이곳 사람들의 양고기 바베큐 예절이라고 하니 흥미롭다. 전날 잠도 제대로 못자고 10시간 가까이 버스에 시달리며 달려온 일행들의 피로회복을 위해 키르기즈맥주와 소주가 한 순배 돌아간다. 네 분의 여성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남자들의 피로회복에는 이만한 청량제가 또 없다. 이국에서의 음식과 친교가 잘 조화되어 왁자지껄 떠들며 몇 순배 돌아 거나한 기분으로 모두가 한마음이 된다.
내일은 산으로 가는 일정이라 긴장도 되지만 주고받는 정(情)이 더 아쉬워 늦은 밤까지 달린다. 식당 아주머니가 싫은 눈치를 보이지 않고 끝까지 서빙을 하며 계속 하라고 웃어 주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카라콜의 늦은 밤을 보내고 4월 30일 아침을 맞는다.
그래도 벅찬 마음으로 짐을 꾸려 호텔 밖으로 나선다. 알튼아라샨까지 2시간 가까이를 옛 소련군용화물트럭을 개조한 산악 전용버스(28인승)를 타고 올라야 한다. 육중한 타이어와 높은 오름판을 딛고 버스에 올라탄다.
나름대로 좌석이 있고 일행들이 충분히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울퉁불퉁한 산길로 접어들면서 울란이 말한다. 얼마 전 눈사태로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듣고 있는데 오를 수 있는 데까지 가서 오늘의 숙박지인 알튼아라샨 산장까지는 3~4시간을 걸어 올라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래도 일행들은 마냥 기대감에 부푼다. 기상캐스터(?)로 나선 최해곤 후배의 재치 있는 날씨예보에 모두들 파안대소 한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 큰 바위덩어리가 굴러 떨어져 차가 갈 수 없게 되었다. 기사와 가이드, 젊은 후배들이 나서서 바위와 돌을 치워 겨우 지나간다. 알튼아라샨 산장까지 가는 여정의 3분의 1정도에 도달하니 눈사태로 길이 완전히 막혔다. 눈이 4~5m 이상 쌓여 있고 차량은 지나갈 수 없고 산비탈 쪽으로 길을 내어 도보로 갈 수밖에 없다.
모두들 내려 어찌할까 고민스러워 한다. 비가 눈으로 바뀌어 눈발이 날리고 시야가 흐려 주변경치를 보기도 어려운 것 같다. 이대로 눈을 맞으며 3시간 이상을 올라야 하는데 자신이 나지 않는다. 해빙기가 되어 계곡 양쪽 산기슭에서 낙석이 떨어질 수 있고 눈이 내려 미끄러운 산길을 오른다는 게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기로 했다. 모두들 아쉬운 모습이지만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안전한 여정을 택했다.
키르기즈스탄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를 놓치는 게 너무나 억울하지만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알튼아라샨 계곡을 빠져 나오며 연신 뒤돌아본다.
일정을 바꿔 그르친국립공원에 있는 ‘키치악수’ 초원 트레킹에 나선다.
현지어로 ‘악수’는 물을 말한다. ‘소눈악수’는 ‘좋은 물’, ‘키치악수’는 ‘작은 물’, ‘총악수’는 ‘큰 물’이라고 한다.
이곳의 고도가 1900m라고 하니 지리산 높이에 있는 대평원이다. 시즌에는 입장료를 받지만 지금은 그냥 입장할 수 있다. 키르기즈 전통모자를 쓴 노인이 차단기를 올려 주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눈길을 따라 대평원의 초원으로 들어선다. 눈이 내리지 않으면 푸른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졌겠지만 눈으로 덮인 끝없는 초원을 아이들 마냥 즐겁게 밟는 일행들의 모습이 하얗게 내리는 눈과 어울려 한 폭의 동양화가 그려진다. 동화 속 겨울이야기에 푹 빠진 듯 모두가 들뜬 모양새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대평원에서 식사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차안에서 도시락으로 한 끼를 해결한다. 밖에는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차안에서는 도시락을 안주삼아 일 배(盃)를 하니 낭만적인 감성이 새삼스럽다.
키치악수 대평원을 뒤로하고 나오는 도로 앞에 수십 마리의 양떼가 무리를 지어 가고 있다. 양의 등에 칠해진 페인트색이 각기 다르다. 함께 방목하지만 주인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표식을 달리 해놓았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목축업이 주업인 국가라 어디를 가도 양, 소, 말 등 가축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당초 일정에 있었던 제티오구스 계곡에 있는 ‘일곱마리의 황소’와 ‘깨진 심장(Broken Heart)이라 일컫는 바위를 보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곧장 이시쿨 호수 최고의 휴양지인 ‘촐폰아타(Cholponata)’로 간다. 1시간 남짓 달려 홀폰아타의 카프리즈리조트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이시쿨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리조트 단지가 엄청 깨끗하고 멋지다.
이시쿨호수 최대 휴양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리조트에서 1박을 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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